김사인 - 시를 어루만지다 / 가을엔 시를 읽겠어요. 가을 시 추천

2016.09.23 22:17Blog

근무 중인 직장에선 계절 마다 한 번씩 '치유 문구' 공모전을 한다. 주제는 그 계절에 어울리면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문구이다. 공모전에 선정된 문구는 현수막에 크게 인쇄되어 가장 잘 보이는 건물 외벽에 걸린다. 하지만 창작 공모전이 아니라 도서에서 인용한 글만 응모할 수 있다. 평소 책을 좋아하는 나도 응모하려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문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사회 인문학, 추리 소설 등 '치유'와는 관계없는 책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을에 어울리는 '詩'를 한 번 읽어보자 해서 구입한 책이 김사인 시인의 '시를 어루만지다' 이다.



이 시집에는 정작 김사인 시인의 詩는 한 편도 없다. 김소월, 서정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옛 시인들 부터 박찬일 시인 등 비교적 생소한 오늘 날의 시인들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단순히 시만 수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까지 함께 담겨있다. 이 책에 소개된 시 만큼이나 가슴을 울리는 것은 바로 작가의 시 해석이다.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긴 말이 오히려 폐가 될 듯하다. 단 넉 줄의 행들이 일어서며 펼치는 저 공간감을 좀 보라. 발목을 벗고 개울을 건너고, 눈 덮인 마늘밭 지나서, 고향집 추녀 끝까지 갔다가, 바람 잠든 마당귀의 고요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눈의 동선에 한 획의 낭비도 없다. -시를 어루만지다. 작가 해석 中-



작가는 본격적인 시 소개에 앞서 가장 첫 장에서 시를 읽는 방법과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 시를 제대로 읽어 보려는 사람은 어떻든 시 앞에서 일단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둘째,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은 추상적인 개념을 매개로 한 논리적 추리,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실물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정서적 공감과 일치에 주로 의거하는 것이다.

셋째, 시를 읽는 일이란, 시를 이루고 있는 소리, 말뜻, 행과 연 등 각 단위들을 포함하여 시 전부를 어루만져 보고 냄새 맡고 미세한 색상의 차이를 맛보는 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를 잘 옷 입어 보는 일'이다.


더불어 첫 장의 가장 마지막에는 '나는 거듭 시에 대해 공경스러우라고 말씀드린다.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겸허와 공경인 것이며, 풀과 돌, 나무, 벌레들에 대한 공경에 통하는 것이며, 실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공경인 것이다.'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왜 이 책의 제목이 시를 '어루만지다'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을 어루만진다는 것. 내 두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혹은 가장 사랑스럽게 무엇을 만지는 일. 잠든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일, 내 사랑하는 연인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일. 시를 어루만진다는 표현에서 시에 대한 작가의 공경과 겸손, 겸허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가을에 어울리는 '치유문구'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적절한 문구를 찾으려고 이 책을 구입했었다. 결론적으로 난 적절한 문구를 찾지 못했지만 대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러 개의 좋은 시들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그 중 두어 개를 기록할까 한다.


墨畵 (묵화)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묵화는 한자 뜻 그대로 먹물로 그린 그림이다. 동양화 특유의  덤덤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이 시도 마찬가지로 덤덤하고 조금은 투박하다. 동시에 가슴 한켠에 시골의 적적한 풍경을 가져다준다.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생각나 괜시리 목구녕이 답답해진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목을 축이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 김사인 작가의 말마따나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어루만지는 것도 아니다. 얹혀진 것이다. 과연 이 표현만큼 묵직하고 깊숙한 표현이 있을까. 오늘 너도 고생했다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났다고.



장수막걸리를 찬양함

   박찬일


겨울은 빈털터리다

우주도 빈털터리다

우주라는 말도 빈털터리다

빈털터리도 빈털터리다

막걸리도 빈털터리다

막걸리가 맛있다


아, 막걸리가 맛있습니다


아! 내 마음에 쏙 든 그 詩. 아, 막걸리가 맛있습니다. 그냥 맛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도 빈털터리고 빈털터리도 빈털터리고 온 세상이 빈털터리인데 지금 마시는 이 한모금의 막걸리가 너무 맛있습니다. 

내 삶이 빈털터리까진 아니더래도 지친 하루를 마치고 저녁 상 앞에서 한 모금 들이키는 그 막걸리의 단맛!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막걸리가 맛있다'라는 생각뿐이다. 특히 그 막걸리가 내가 직접 만든 막걸리라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다. 그 재미를 잊지 못해 계속 술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다음 주에도 술을 빚으려 했는데 마침 잘 만났다. 이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