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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데뷔, 생애 첫 모델 촬영기

2019년 동대문에 쇼핑하러 가던 차에 마침 한창이던 DDP Fashion week 행사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혹시 몰라서 카메라를 챙겨가길 잘했다 싶었다. 처음 가봤는데 그곳은 피사체에 목말라있던 나에게 작은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별 다른 말없이 카메라 렌즈를 보이면 모델들이 알아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프로처럼 능숙해 보이는 사진가들 사이에서 약간 주눅이 들긴 했지만 꾹 참으며 이내 사진 촬영에 빠져들었다. 이 곳에서 찍은 모델의 사진을 내 인스타그램에 게시했고 #DDP 등의 태그를 달았다. 태그를 검색해서 자신의 사진을 본 모델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사진 촬영을 제안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DDP 모델 사진

가장 왼쪽의 친구가 내게 사진 촬영 제안 메시지를 보냈을 때 기쁨 반, 두려움 반으로 가슴에 기분 좋은 떨림이 일었다. 한 차례, 나는 프로 작가도 아니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 정도라고 얘기했으나 이 친구는 여러 사람의 사진들 중에 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경력은 상관없다고 말했다. 메시지를 몇 번 주고 받다보니 이 모델은 정식 에이전시와 계약한 프로 모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부탁한 사진은 본인이 아니라 가운데에 있는 여자친구의 포트폴리오 사진이었다. 사진 상에서는 양쪽의 프로 모델들과 거리낌 없이 포즈를 취하고 있으나 이 친구는 프로 모델을 지망하는 일명 ‘아마추어’ 모델이다.

 

한국을 잘 모르는 이들은 내게 촬영 장소와 시간을 전적으로 맡겼다. 나는 해질녘의 세운상가를 선택했다. 모델의 서구적인 모습과 오래된 산업적 정취가 남아있는 세운상가의 간판들과 낡은 건물들이 잘 어울릴거라 생각했다. 나의 첫 모델 촬영에 감사하게도 아내가 자처하여 도움의 발걸음을 해주었다. 그렇게 종로3가 앞에서 키 큰 프랑스인 두 명을 만나 약간은 어색한 인사를 주고 받고 본격적으로 촬영에 돌입했다.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미리 봐두었던, 일명 ‘세운쿠바’

업무적으로 수리 부품을 구하기 위해 세운상가를 지난 5년 동안 발바닥에 땀내면서 누비고 다녔다.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첫 촬영인 만큼 공을 더 들였다. 촬영 이틀 전에 부품을 사러 나갈 핑계를 대고 카메라를 들고 세운상가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를 촬영 할 생각으로 이 장소를 바라보니 익숙하던 곳에서 다양한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내 마음에 가장 들었던 곳은 샛노란색과 분홍색이 눈에 띄는 일명 ‘세운쿠바’다. ‘세운쿠바’는 순전히 내가 지어낸 싱거운 이름이다. 건물색이 마치 티비에서 보았던 쿠바의 강렬한 원색 건물을 생각나게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찍으면 색다른 느낌을 갖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사진이 잘나와서 만족한다.

 

아이폰 혹은 유니클로 광고의 느낌을 내보려고 했는데,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약간 비슷해서 마음에 든다. 사실 이 날을 나의 사진가로서의 데뷔(?)라고 하기에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바로 촬영비를 받았느냐의 문제이다. 촬영비를 받고 찍은 사진이라면 ‘페이 사진가’로서의 작은 첫 발을 살포시 디뎠다고 할 수 있겠으나, 찍고 보정하는 순간에도 촬영비 얘기는 서로 꺼내지 않았다. 나로써는 첫 촬영이고 완전히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비용을 요구하기 민망했고 저쪽에서는 경험이 없는 작가에게 모델을 해주고 그 대가로 사진을 받으니 나름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 했을 수 있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에 끝내 비용은 거론하지 않았고 전혀 후회 또는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즐겁게 촬영하고 정성들여 보정했다. 다만 이 모델이 눈밑 다크써클이 좀 두터워서 보정하는데 손이 많이 갔다. 많은 사진들 하나하나 마다 다크써클을 지우고 있으니 되려 내 얼굴에 다크써클은 짙어갔고 ‘공짜로 하는데 대강 줄까’ 싶었다. 하지만 촬영 중간에 이들이 한 말 때문에 결과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포트폴리오를 찍어준 첫 작가는 절대 잊을 수 없어요. 저도(프로 모델) 아직 제 첫 사진가를 기억하고 있어요.’ ‘We can never forget the first. I still remember my first.’

 

내 부족한 사진이 작은 밑거름이 되어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녀도.